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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대가야 역사, 향교 안에 살아 숨쉬다

1413년 주산아래 첫 창건…3 차 례 이전 현 위치 자리잡아
1 6 0 0년전 대가야 궁성터…유적 7기·토기 등 많은 유물 출토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입력 : 2014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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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향교 전경
ⓒ 고령군민신문


◇고령향교, 고령의 최고 명당에 터를 잡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과 함께 국가의 양대 관학으로서 지방사회에서 성리학의 교육과 성현들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된 공립교육기관이자 향사기관이었다.
일반적으로 향교에는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건물로 명륜당이 있고,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들을 모시고 향사하기 위한 대성전이 앞뒤로 자리 잡고 있다.
고령읍 연조리의 주산(主山혹은 耳山)의 지맥이 뻗어 나와 만든 구릉 위에는 고령유림 교육의 산실인 고령향교가 자리 잡고있다.
주산에서 흘러내린 내룡(來龍)은 지기가 뭉쳐지는 혈장(血場)까지 몇 차례 굽이치면서 향교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대가천 너머 위치한 망산(望山)은 고령향교의 안산이면서 곧 조산이 된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고령읍에서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길지에 입지하고 있다.


◇고령향교 건립과 이건의 역사 고령향교는 처음부터 현재의 자리에 건립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창건된 시기는 1413년(태종 13)으로, 건립 위치는 '현서쪽 2리의 이산(耳山) 즉 주산아래'였다.
이후 ‘관백전 우협(官栢田 右峽)’으로 1차 이건하였지만, 그 시기 및 위치는 알 수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향교가 소실되자 향교의 노비가 위패를 주산 아래인 현재의 연조리 관음사 뒤편에 묻었다.
난이 끝난 후 그 자리에 향교를 중건하였는데, 이것이 2차 이건이다.
그 후 1663년(현종 4) 현감 조봉원(趙逢源)이 부임하면서 중수하였다.
당시 공역은 1663년 11월에 시작하여 1664년 3월에 마쳤고, 1665년 7월에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의 중수기를 받았다.
이후 1702년 2월 현감 구문유(具文游)가 고을 인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건 공사를 시작해 6월에 완공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이것이 3차 이건이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처음 주산 아래에 건립된 후 3차례 자리를 옮겼으며,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1702년이었다.
현재의 고령향교는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하고 앞에 명륜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그리고 공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27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한편 고령향교 옆공터에는‘대가야국성지비(大伽倻國城址)’비석이 서 있다.
원래 이 곳에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9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남차랑(南次郞)이 ‘임나대가야국성지비(任那大伽倻國城址碑)’를 세웠다.
해방 후에는 ‘임나’와 ‘남차랑’의 글자를 지우고 그대로 유지하다가, 1986년 12월 천안의 독립기념관으로 옮기고 대신 현재의 비를 세웠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조선 점령의 합리화하기 위해‘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허구로 드러났으며, 대가야가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 대가야국 성지비
ⓒ 고령군민신문


◇고령향교 자리에는 1천600년 전 대가야 궁성지가 있었다.
고령향교가 위치한 지역은 1,600년 전 대가야의 궁성지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지난 2000년 8월부터 2001년 1월까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고령군의 의뢰로 고령향교 주변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건물지와 구덩이 등 7기의 유적과 대가야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다수의 기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향교 동쪽 옆 고령성당 뒤편 기슭에서 이른바 ‘대벽건물지(大壁建物址)’가 확인됐다.
건물지는 동쪽과 서쪽에 2개의 부뚜막이 있고 진흙으로 만든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체의 형태는 ‘ㄴ’자 모양이었다.
확인된 길이만 약 7.5m 정도이므로 전체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벽은 두께가 약15cm정도이고, 높이는 현재 20cm 정도 남아 있다.
부뚜막은 폭 1.3m, 길이 1.2m이며, 형태는 뒷부분은 아치형이며 입구부분은 ‘凹’자형이다.주변에서는 대가야시대의 기와와 벽돌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대벽건물’이란 밖에서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 큰 벽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따라서 이 건물지는 바닥에 벽돌을 깔고, 흙벽과 나무기둥으로 기와지붕을 받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의 건물은 가야지역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백제나 신라에서도 궁전이나 절터에서만 확인된다.
아치형의 대형 부뚜막은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3호분의 부엌그림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건물은 대가야 궁성내에 건립된 왕실과 관련된 주요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향교에서 고령의 역사를 보다.
고령향교가 건립되어 있는 곳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대가야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인 궁성과 왕실 건물들이 건립되어 있었다.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왕궁은 폐허가 되었다.
대신 신라에서는 대가야의 궁성이 있던 곳에 절을 건립하여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사람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 절이 바로 물산사였는데 조선시대가 되어 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되면서, 물산사는 점차쇠퇴해져 갔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그 곳에 고령향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1702년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땅 속에서 옥기와, 주춧돌 등이 나왔는데, 당시 사람들은 옥기와 등은 대가야 궁궐의 흔적이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곳이 ‘임나대가야국성지’ 비석을 세웠다.
독립이 된 후 그 자리에‘대가야국성지비’가 건립되었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대가야시대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령지역의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한 몸에 품고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전단문, 해자 통과 위해 교량형태로 건축고령군 학예사로부터 대가야궁성의 구체적인 모습과 관련 유적 및 전설에 대해 알아본다.
우선, 대가야의 왕궁과 궁성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두고 말씀을 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먼저, 대가야시대의 최고지배층인 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이 생활하는 왕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장소는 현재 고령향교가 있는 고령읍 연조리의 고령향교가 있는 구릉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0년도 발굴조사를 통해서 건물지를 일부 확인한 것도 이러한 추정의 근거가 됩니다.
특히, 대가야의 왕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궁성이 존재했던 사실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됩니다.
‘삼국사기’의 562년(진흥왕23) 9월 대가야 멸망 기록에 따르면 궁성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전단문 혹은 전단량이 건립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전단량을 설명하면서 ‘전단량은 성문의 이름인데, 가라(가야)의 말로 문을 량이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라(가야)지역의 로 ‘량(梁)’은 '문(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량(梁)은 ‘교량, 다리, 들보’ 등의 의미여서, 문(門)과는 쉽게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성곽의 모습을 잘 생각해 보면 ‘문’과 ‘량’은 의미가 통합니다.
즉, 고대사회의 성곽은 방어를 위해 주변에 커다란 구덩이인 해자(垓字)를 파고, 그 속에 물을 채운 다음 성에서 외부로 통행하기 위한 교량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일본의 성을 보면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쉽게 그림이 그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사회 특히, 가야에서는 이러한 해자가 일반적 이어서 성문은 통행을 위한 교량의 형태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 입니다.
이 때문에 ‘문’을 ‘량’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대가야에는 왕궁 방어를 위한 궁성이 존재했고, 궁성의 출입문인 전단문은 해자를 건너 통행하기 위해 교량형태로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가야 궁성의 모습을 그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가야에는 왕궁을 방어하는 궁성이 있었고, 그 궁성의 출입문인 전단문은 해자를 건너는 교량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단문 부근에는 조서문이 있어 왕이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조서를 반포했다.
또, 성 안의 왕궁 옆에는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구신정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커다란 구신나무가 서 있었다”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입력 : 2014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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