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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령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영주(令洲) 김상덕(金尙德) 선생 서거 64주기를 맞으며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입력 : 2020년 0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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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김상덕)

김상덕 선생은 고령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후, 1956년 서거할 때까지 한날한시도 쉬지 않고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신 분입니다. 

2018년에 결성된 <김상덕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영주 선생의 업적을 현창하고자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마다 돌아오는 선생의 기일(4월 28일)에 주산에 있는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 사적비’를 찾아 추도식을 올리는 일입니다. 올해도 우리 사업회에서는 4월 28일(화요일) 오후 5시 반부터 사적비 앞에서 조촐한 추도식을 갖고자 합니다. 애국심과 애향심이 투철하신 군민 여러분의 동참을 희망합니다. 참고로 영주 선생의 [연보]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1942년 제3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념)



               ( 1945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


[주 김상덕 선생 연보]

김상덕 선생은 1891년 12월 1일, 경북 고령군 고령면(대가야읍) 저전리 558번지에서 부친 김성옥(金聲玉)과 모친 김경익(金敬益) 사이에서 6남매(상홍尙弘, 상휘尙徽, 상권尙權, 덕련德蓮, 상덕尙德, 상학尙學)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선생의 출생지 바로 윗동네인 내상리의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선생이 운영하는《내산서당乃山書堂》에서 유학을 배우다가, 스무 살의 늦은 나이에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 중퇴하였다.

1913년, 같은 덕촌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던 죽포(竹圃) 이규민(李圭敏) 선생이 조직한 《청년계靑年契》에서 김상덕 선생과 일성(一星) 문상직(文相直) 선생을 선발하여 서울의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1885년 언더우드가 설립)로 유학을 보냈다.

1917년, 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하였다.

1919년,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을 결행하였다. 영주 선생은 이광수·최팔용·김철수·서춘·김도연·백관수·윤창석·이종근·송계백·최근우 등과 함께 11인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선언을 주도한 결과 투옥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간 복역하였다.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후 3월 5일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에 경상북도 출신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출옥 후 중국상하이에 도착을 알린 보도기사 독립신문 1920년 3월6일자)


이후 1922년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주최의 <극동민족대회>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등 중국 본토와 만주 일대에서 한 시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32년 만주에서 군사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청천, 김창환, 황학수, 신숙,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등 40여 명의 《한국독립당》 지도부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난징으로 이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정의 난징 탈출과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선생의 가족도 우한(武漢)과 구이린(桂林)을 거쳐 1939년 초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충칭에서 선생의 부인인 강태정 여사와 막내딸을 잃었다.

1941년, 《민족혁명당》과 함께 임정에 합류하였으며, 1942년(51세)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11월 4일에는 임시정부 약헌(約憲, 임시헌장, 헌법) 수개위원(修改委員)에 선임되었다. 5차 개정 약헌은 1944년에 완성되었다.

1943년 4월에 임정 국무회의 선전위원, 5월에 임정 학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0월에는 의정원 학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주석은 김구, 부주석은 김규식이었다. 8·15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선발 1진으로 귀국하였다.

19446년 연말에 미군정이 실시한 《과도입법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친일파를 활용하고자 한 미군정이 법률을 공포하지 않아 사장되고 말았다(1947).

1947년, 경영난에 빠진 경신중학교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재건하였다
(~1950).

           ( 2.8 독립선언서 서명자에 김상덕 이름이 있음)


1948년 5·10총선에 지역구인 고령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생은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헌법을 기초하였는데 부칙에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공포(9.22)하고《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9.29)으며 선생은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1월 8일, 박흥식을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이종형(1.10)과 최린·방의석·김태석(1.13), 이승우·이풍한(1.14), 이성근·이기용(1.18), 박중양·김연수(1.20), 정국은·하판락·김우영(1.22), 노덕술·이두철(1.24), 유철·노기주(1.26), 조병상(1.27), 김갑순(1.28), 문명기(1.30), 서영출·임창화(1.31), 이광수·최남선(2.7), 김덕기(2.8) 등을 차례차례 구속함으로써 반민특위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경찰이 백주대낮에 반민특위 본부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서류를 탈취하는 테러 만행을 저질렀다(6·6사건). 반민특위 특경대원과 직원 등 35명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반민특위가 수집한 친일파 자료들은 모조리 빼앗겼다.

이승만은 6월 11일 외신기자들 앞에서 6·6테러는 자기가 지시한 일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범죄에 가담한 자들 역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연이은 제2차 국회프락치 사건과 백범 선생 시해(6.26)로 위축된 국회는 이인·곽상훈 의원의 주도 아래 공소시효를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장악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7.6). 선생은 즉시 이에 항의하여 위원장을 사퇴하였다(7.7). 10월 4일에는 아예 반민법 자체를 폐기처분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반민특위의 활동은 1년 만에 아무런 성과 없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1950년, 5월 총선에 다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의 악랄한 방해와 탄압 때문에 3등으로 낙선하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었다. 아들(김정륙)이 인민군에게 잡혀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다가 잠복 중이던 인민군 ‘모시기 공작조’에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월북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지만 선생의 고향에서는 월북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북에서는 납북자들을 따로 모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라는 관제 단체를 만들었으나 선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1956년, 영주 선생이 이북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평양 룡궁동 재북인사묘역에 선생의 묘소와 비석이 있다. 그 명문(銘文)에 ‘나신 곳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이며 ‘돌아가신 날자는 1956년 4월 28일’이라고 적혀 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1992년, 고 백운학 선생 등 고령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주산 입구에 ‘광복지사(光復志士) 영주(令洲) 김상덕(金尙德) 선생(先生)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글은 이가원 선생이 짓고 글씨는 향토의 김문배 선생이 썼다.

영주 선생의 외아들 김정륙 선생(1935년생)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과 광복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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