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178호입력 : 2016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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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행랑아범
녹음이 짙어져 바람조차 싱싱하고 파란 녹색을 띄우면 문득 그리운 행랑아범의 향기를 만지고 싶어집니다. 태초의 그리움으로 다가와 살포시 가슴 설레게 하여 놓고 저 멀리로 돌아가는 당신의 노래를 ‘호국의 달’이 되면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되며 입속에 녹여 불러 봅니다.
유언(遺言)으로라도 살짝 내려놓고 가실 듯도 하련만 끝내 가슴에 묻어서 가져가신 당신의 향기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오늘 이 아침에 할머님의 좋은 사람 행랑아범 박서방의 노래를 기도 해 보렵니다. 할머님의 유택에서 가장 멀리까지 보이는 “저어 쪼오오옥 물가의 물푸레나무 둥치 밑”을 맴돌아 가는 바람이 되어 다녀 보았지만, 아직껏 할머니의 고마운 그이를 만나지 못 하였습니다.
경인(庚寅)년 한가위 휘영청 밝은 달빛의 무정함속에, 태어나 처음 듣는 총 쏘는 소리에 귀뚜라미조차 숨죽여 웅크리고 앉아서 가는 숨을 쉴 때 이었다지요?
온 마을이 삭제되어가는 역사의 회오리 화약 냄새 속에서 지리산 막둥이 감악산의 으스름 그림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양을 하며 무성영화처럼 또 그렇게 외마디 고통의 아픔조차 느낄 사이도 없이 산자와 죽는자를 분리하는 도깨비 불장난을 보셨다고 말씀하심을 기억하지만, 하룻밤이 몇 십 년보다 길고 길었던 끝자락의 아침 햇살은 물푸레나무의 찢어진 이파리들을 뒤집어쓰고 눈 뜬 주검으로 뒤엉겨있던 푸른둥이와 누렁둥이를 모두 포근히도 덮어주고 있었다고 하셨지요?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라는 이유로, 푸른둥이가 되어 용감히 간 사람도 있고, 누렁둥이가 되어 끌려간 사내들도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두려움에 도망하여 산속에 숨어 버린 남정내도 있었다지요. 무심히 흐르는 물길에 시신 녹아드는 냄새가 오래도록 바람타고 맴돌았다고 하셨지요.?
보름정도의 날자가 지난 어느 으스름 별빛조차 귀하던 한 밤중에, 피 묻은 도포자락을 입고 계신 할아버님을 업고 마을 입구를 들어서던 행랑아범 박서방은, 정작 당신의 총알 스친 다리가 퍼렇게 썩어 들어가는 아픔조차 참으면서 ‘나으리 모시기’에 끝까지 성심을 다한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씀 하셨지요.
지금은 합천댐의 감정 없는 물길이 굼들(굽은들판) 모두를 온통 덮고 있지만, 당시 고향 떠나 먼 곳에서 하늘간 푸른이와 누렁이의 거반 문드러지고 일부 고기밥 되고 남은 사람흔적 꺼풀들을 뒤적거려 많은 혼백을 좋은 곳으로 보내놓고, 행랑아범 박서방 당신도 혼자서 명줄을 놓고 그 멀고 먼 저승길을 나서서 가셨다고 하셨지요.
행랑아범의 시신을 꽃가마가 아닌 멍석 거적으로 둘둘 말아 묻어 주었는데, 그래도 저승길에 술 한 잔을 먹여 보내야 하신다며, 조상님 제사 드는 하루 전날에 미처 덜 익은 제사용 맑은 술을 행랑아범 거적에 부어 주셨다는 아픈 말씀은 하시면서도, 할머님은 끝내 그이의 무덤 장소는 말씀 않으시고 가슴에 담아 가지고 높은 곳으로 가셨지요. 할머님, 저도 그 누군가의 행랑아범이 되고자 다짐을 해 봅니다. 수필가 한봉수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178호입력 : 2016년 0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