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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을 안고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00호입력 : 2016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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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군민신문 


자작나무 숲을 안고

바람을 닮아 보고 싶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쳐 온 바람의 노래를 만져보면, 할머니와 어머니와 큰어머니를 말날 수 있고 그분들의 아리랑을 느낄 수 있어서 나 또한 그렇게 이 세상의 징검다리를 건너본다.
인생이 팍팍하여 가슴이 답답해지면 자작나무 울창한 마을 앞 강가의 숲속을 걸으며, 태고의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할머님의 말씀을 바람으로 부르는 노래를 짓고 싶어진다.

생감으로 먹물들인 무명으로 만든 치마를 받쳐 입으셨던 할머님의 속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던 곶감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나만의 그림을 그리려 자작나무 숲을 걷고 싶다.
찔레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던 초 여름날에도 할머님의 바지 주머니에서는 곶감이랑 엿가락이 화수분처럼 나왔었다.

특히 할머님이나 어머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난 날이면 반듯이 주전부리들이 나왔던 것을 기억하니, 지금이라도 산 너머 할머니님의 안식처 유택을 찾아가면 이 세상의 온갖 탁세(濁世)의 어려움을 잊을 평온의 알약을 주실 듯하다.
그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로 자라면서 어머님의 속을 얼마나 까맣게 태웠는지 모르는 나는 동화속의 인물 팥쥐 만큼이나 까불며 미운 짓거리로 촐랑거렸다.

사촌형과 나의 장난이 심한 날은, 할아버님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줄줄이 읊으시며 “조상님들의 자랑스런 손자로 착하게 자라야 하는데, 너희들처럼 장난만 치면 되겠느냐?” 하시며 길고 길게 타이르시는 것이 어머님의 혼내는 방법이셨지만, 형과 나는 꾸중을 들으면서도 어머님의 눈길을 피해 가면서 장난질을 치곤했고 어머님이 모르는 줄 알고 자랐다.

어머님의 꾸중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항상 반쯤 열려있는 방문 밖으로 할머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셨고, “얘야 그만하면 됐다.”로 우리들의 꾸중 듣는 시간은 끝이 나곤 했다. 물론 할머님이 곶감을 주시고.
어머님께 꾸중을 듣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할머니께서 곧장 오셔서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나가셨고, 할머님이 곶감을 주시기는커녕 아무런 군것질거리를 주시지 않으시고, 형과 함께 동네 뒷동산 잔디밭에 앉혀 놓으시고 아무른 말씀도 않으시며 그냥 한참을 그렇게 계셨던 것 같다.

바깥은 옅은 회백색이고 안은 피의 색인 깔때기 모양의 종을 한 개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꽃봉오리를 푹 숙이고 있는 꽃을 보라하시며, 누런 잔디에 파묻히듯 피어있는 이 꽃이 할미꽃인데 너희들처럼 장난질하는 아들을 둔 어미가 속이 터져 죽어서 피는 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무덤가에 많다고 하시면서.
난 정말 어머니가 속이 터져 돌아가시는 줄 알고 겁이 나서 크게 울면서 살려달라고 할머니께 매달렸다. 곶감 없어도 좋다면서.

그 후론 혹시라도 어머님이 돌아가실까 걱정이 되어 우리들의 장난질은 멈추어진 것 같다.
많은 세월이 지나서 군 복무시절에 할머님이 매우 위독하시다는 관보(官報)가 왔고, 고향집에 도착 했을 때는 할머님의 모습은 누른 삼베 조각들로 만들어진 이상한 옷 즉 수의(壽衣)에 감추어진 뒤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하신 구순(九巡)을 내다보는 연세로 타계하신 할머님은 유언으로 하신 이 세상 마지막 말씀이
“그 녀석 오거든 곶감 주어라.” 이셨단다.
장손도 아닌 당신의 막내아들의 셋째 아들이 군 복무로 장례식에 못 올지도 모르는 그 시절에, 곶감 한 조각을 남겼다가 당신의 이름으로 주라는 할머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였다.

흐르는 세월은 멈추지 않아서 할머니는 물론 큰아버지를 비롯한 이십 여명이나 되던 집안어른들이 하늘로 가시고, 할머님의 막내며느리이신 어머님은 가슴의 짐을 내려놓으시려고 요양원에 계신다.
누구도 말씀을 입으로 내 놓지는 않으셨지만, 가슴과 가슴으로 나누신 무언의 약속을 어머님은 나에게 나누어 주신다.

한국동란의 끝자락 무렵부터 수년간에 무수히 많은 어린아이가 태어났고 또한 열악한 위생환경과 사회여건으로 엄청 많은 어린 생명들이 죽어갔단다.
그 와중에 십대 종손이신 사촌형 바로 밑이며 나와 동갑내기이던 사촌 동생이 병마로 잘못 되었을 때, 큰어머님의 낙심하심이 하늘에 닿았고 괜히 먼저 간 아들과 동갑이던 내가 미워서 마음이 혼란해 했었단다.

자식 잃은 어미인 큰어머니의 마음, 장손조차 잘못 될까? 걱정하는 할머니의 애태움, 먼저 간 조카 녀석과 동갑내기 아들을 둔 어머님의 죄 없는 죄스러움, 최악으로 장손이 잘못되면 대타가 될 운명이었던 나를 바라보며 며느리들의 눈치를 살피신 할머님이 잘 들리도록 크고 길게 나의 어린 잘못조차 꾸중을 하셔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 계셨던 할머님의 할미꽃 가르침은 나의 평생 아리랑이 되어 자작나무 숲을 맴돈다.
-수필가 동화 한봉수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00호입력 : 2016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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