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37호입력 : 2017년 0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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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현장을 찾아서 ②]
팔만대장경 지킨 ‘공군영웅’ 김영환 장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영웅, 빨간 마후라 김영환 장군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12월 18일 미군으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4기의 공군 편대에 이 명령이 내렸는데 편대장은 김영환 대령이었다.
해인사는 최근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국보중의 국보인 고려 고종 때, 15년의 세월에 걸쳐 조성된 8만1천258장의 고려대장경과 4천845매의 사간본(寺刊本)이 보존된 법보사찰이다. 당시 전투기는 네이팜탄과 로케트탄을 싣고 있었는데 네이팜탄 하나만 터트려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때 김영환 장군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뚝 떨어진 곳에 기관총만을 쏘았다 한다. 해인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당시 가야산 일대에 있던 인민군 낙오병과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함인데, 사실 당시 가야산 일대에 유격대가 있긴 했지만 당시 해인사 주지 효당 최범술 스님은 유격대 지도부와 담판을 통해 "당신들이 이곳에 있으면 미군에게 찬란한 민족문화의 보고인 해인사를 폭파할 빌미를 주는 것이니 떠나 달라"고 했고, 유격대는 얼마간의 양식을 얻어 그곳을 곧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기자가 지난날 사천 다솔사에서 효당 최범술 스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이고 또 어떤 기회에 당시 유격대로 참가했던 박종우 선생(전 동아대 사학과 교수)에게 직접 들었던 얘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시 작전권이 없는 국군으로서는 상부인 미군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즉결처분을 받을 수 있어,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항명이었다.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오직 전쟁광만이 내릴 수 있는 야만의 명령인데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대장경을 지킨 영웅이 있었으니 당시 31세의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인 것이다. 명령 불복종죄로 미군 작전 사령부에 호출되어 간 김영환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해인사는 법보 사찰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로써 영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국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이런 당당한 태도에 미군 작전 장교는 젊은 공군 편대장의 조국의 문화사랑에 감복을 했다는 것이고 조사를 하던 미군 소령은 벌떡 일어나 경례를 올리며 "김영환 대령님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신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한편 경무대에서 이 보고를 받은 분단의 주역이자 친미의 화신인 이승만은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사형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데 당시 친형이기도 한 김정렬 공군 참모총장이 자랑스러운 민족문화를 지키겠다는 김 장군의 뜻을 전달하고 설득하여 사형을 모면하였다 한다.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될 뻔 한 세계에 자랑할 문화유산이 젊은 영웅의 목숨을 건 결단으로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6.25 참극 때 민족문화유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교유산이 강원도 고성 건봉사를 비롯해 오대산 월정사 등 60%이상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라졌다는데 이런 젊은 영웅의 결단이나 상원사를 몸을 던져 지킨 고승 한암 대선사의 행적, 설악산 신흥사의 문화재를 지킨 청년장교 리영희 같은 이들의 고귀한 결단으로 상당부분 살아남은 것이다.
1954년 8월 5일 강릉지구 훈련 비행 도중 서른네 살의 푸른 나이로 애석하게도 산화한 김영환 장군은 1921년 1월 8일 서울 서대문로에서 태어나 경기중학을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관서대학을 거쳐 일본 육군 예비 사관학교에 입교, 소위로 임관하여 잠시 복무하다가 8.15뒤 공군 창설 7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착용하였다 하며 엄격하고 철저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지만 문학을 동경하였던 정서적 성격의 소유자였고 인간미 넘치는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한다.
2002년 6월 17일 불교 조계종과 공군본부에서 해인사 경내에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를 세웠는데 가로 250cm 세로 215cm로 팔만대장경 경판 모양으로 세웠는데, 해인사 일주문 앞에서 오솔길(인도)을 따라 내려오다 왼편에 있는데 성철 스님과 자운 스님의 사리탑 건너편 쪽이다. 비문은 지관스님에(현 조계종 총무원장)이 쓰셨다.
김영환 장군 공적비를 알리는 안내판 하나 없는 것이 아쉬웠고 공군 사관학교 내 공군 박물관에 김영환 장군 흉상이 자그만하게 전시되어 있고 전투기를 타고 찍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지만 이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군의 동상을 미래 공군의 주역이 탄생할 요람인 공군 사관학교에 우뚝 세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김효사 전문기자는 경북 고령 출생으로 92년 시집 ‘집 없는 사람들의 조국’(도서출판 불꽃)을 출간하면서 등단했다. -편집자 주-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37호입력 : 2017년 09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