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님, 몇 일 전에 소위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소천 하셨다는 소식에, 지난 광복절 기념식이 생각나서 흰머리 조카가 소식 한 장을 올립니다. 육신은 벌써 팔십 구십이라 허리가 굽고 살이 빠져 흡사 허수아비 형상이지만, 기상은 20대이신 그분들의 고운 한복을 TV에서 보고 있노라니 고맙고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솟구쳐서 눈물이 났었습니다.
고모님의 오빠 동생들, 사촌, 육촌, 형제들이 이제 하나둘 하늘로 가시고 저의 어머님 한분만이 그것도 요양원에 계십니다. 지난해에 우리 성씨의 대종족보를 중앙종친회에서 정리하여 새로이 발간한다 해서 부족한 제가 초단을 정리하면서 아무리 찾아봐도 고모님의 흔적은 없었어요.
요즘은 딸들도 족보에 실명으로 등재가 되는 집안이 대세지만, 고모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던 당시는 남편 즉 사위 이름만 기록되던 시절이고 특히나 영혼결혼을 하신 고모부의 이름조차 올릴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초등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님이 들려주신 고모님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 할아버님의 딸 고모와 고모의 남편 박서방 )을 올리면서 고모 이름 옆에 애국지사라고 적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모님이 생각나서 합천댐 물속에 잠자고 있을 고모님 유택을 찾아 갔었습니다.
고모님은 필리핀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일본의 패망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 왔었지만, 향교출입을 하시던 고모님의 아버지이자 저의 할아버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지 못하시고 괴로운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지요? “저기 그 얘들이 누워 있다. 아이가. 불쌍한 너희 고모.” 하시던 할머님 말씀에 의지하여 어름푸시 본 듯한 정을 느끼곤 했었죠.
요즘은 자유사상의 세상이라 나이 차이가 수 십 살인 부부도 가끔 소식통에서 듣기도 합니다만, 과연 우리가 말하는 [저 세상] 그곳에서 고모님은 즐거우십니까? 고모님의 아버지이자 저의 할아버지이신 연암선생님보다도 몇 살 더 많은 행랑아범 박서방을 남편이라 모시고 생활하심이 편안 하십니까?
한국동란이 발발하고 첫 번째 추석 무렵, 하얗던 두루마기와 도포자락이 온통 핏빛으로 변한 피난 가셨던 나으리(할아버지)를 사력을 다하여 모시고 다니시다 정작 당신은 총알의 독인지 파상풍인지로 세상을 마감한 할아버님의 가마꾼 박서방과 영혼 결혼을 한 고모님의 저 세상의 생활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이 조카가.
양반 가문에서 어찌 가마꾼인 상민과 혼인을 할 수 있느냐? 하시며 노발대발 하시는 할아버님을 힘들게 설득시킨 분도 할머님이셨대요. 할머님께서 어린 손주를 앞에 앉혀놓고 옛날에 들려주신 이야기는, “살아생전 못난 남정네들이 힘이 없어서 그 어린 것이 왜놈들에게 끌려가서 그런 고초를 격고 왔고, 대처에 살았다면 문제없이 잘 살았을 것인데, 아버지가 그 잘난 양반 허울을 쓰고 있어서 이 세상을 등진 딸래미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죽은 영혼들끼리 하는 결혼마저 막는 것이 양반의 법도라면 억울하게 죽은 내 딸은 족보에서 파내 주이소. 그러면 내가 상놈이라도 근실했던 박서방과 귀신 결혼시키고, 저승 가는 천도제라도 지내서 내 딸년을 위로해 주고 죽을랍니다.”하고 사생결단하는 심정으로 진언하여 고모님 닮은 허수아비에게 비단옷 한 벌 얻어 입혀서 영혼 결혼을 시켰다는데, 고모님은 정말로 위로가 되었고 웃으면서 저승을 가셨는지요?
고모님, 이 조카가 세상 살아보니, 기쁨도 화남도 슬픔도 즐거움도 차이가 없이 도진개진 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참고 이세상일 모두 잊으시고 그곳에서 즐거움만 누리고 살아가소서. -수필가 동화 한 봉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