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48호입력 : 2017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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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김장하는 ‘설씨 새댁’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꼭 요맘때였다. 고향의 뱀 모양으로 꼬부랑꼬부랑 흐르는 개울가의 웅덩이에서 ‘새댁 설씨 아줌마’가 김장을 하던 筆者의 아주 어린 시절이. 지금이야 집집이 핵가족화 되었고 무엇보다 경제적 풍부가 다양하고 영양가 높은 반찬거리를 아주 신선하게 만들어 먹고 있고, 다양한 전문가를 요구하는 사회 구조가 김치마저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여 전 세계 곳곳에 공급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남정네들은 땔감 준비하고 이엉 엮어서 초가지붕 고쳐 덮는 것이 겨울나기 준비였고, 여인네는 김장김치와 장 담그는 일을 마쳐야 비로소 겨울 冬장군을 맞을 준비를 다 하였다.]는 세시 풍속어가 사라질 것 같은 걱정도 된다.
하기야 요즘 남정네들은 겨울 준비가 따로 없이, 소위 ‘自然人’이라고 하는 좀 특이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면 딱히 사계절 구분 없이 일을 하고 있지만, 여인네들은 아직 김장이나 간장 등을 규격품 보다 家風에 의한 개성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는 실정이니 앞서 걱정을 잠시 접어 두어도 될 것 같다.
우리의 김치는 발효식품으로 젖산균에 의한 독특한 향미와 풍부한 영양공급을 자랑으로 여기고 세계인의 입맛을 공략하고 있지만, 일본의 기무치는 발효를 시키지 않은 생절임 종류이지만 각자가 세계인의 입맛 쟁탈전을 벌이고 있음은 그냥 웃을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김치의 역사를 알아보자면, 중국의 시경(詩經)에 오이를 깎아 菹(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呂氏春秋에는 보다 상세하게 채소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초절임하거나 숙성시켜 신맛을 내는 식품을 역시 저(菹)라고 소개 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중국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실생활 보다 명분에 치우친 사상 때문인지 상당히 나중에 기록물이 나오는데, 일본의 도다이사(東大寺) 正倉院(정창원)에 소장되어 있는 新羅村落文書(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삼국시대 아니 요즘 말로 대가야국이 포함 된 [사국시대] 이전인 상고시대부터 김치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하고 있다.
筆者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사국시대에 농경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곡류가 主食이 됨에 따라, 곡류의 消化(소화)를 쉽게 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위해 염분이 있는 채소류를 먹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증해 본다.
또한 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의 [家圃六詠]에는 “순무를 장에 넣으면 여름에 먹기 좋고, 淸鹽에 절여 九冬至에 먹도록 대비 하였다.”하였으니 여름에는 장아찌를 만들어 먹고 겨울에는 동치미를 만들어 먹었던 같다.
그런데 筆者는 역시 개인적인 私見으로 배추가 광해나 중종 시절에 들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18Ce 초 중엽부터 통이 크고 속이 꽉 찬 결구형 배추가 들어와서 지금처럼 속에 맛난 소를 넣은 김치가 만들어 진 것으로 소개 하고 싶다.
먼 옛날, 우리 마을에는 아주 획기적인 ‘김장 담그는 기술’이 소개되어 온 마을 사람이 칭찬을 아낌없이 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 여인이 바로 [설씨 새댁]이었다. 할머님의 말씀으로는, 당시 소금은 아주 귀하고 값 비싼 물건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는데, 집집마다 김장을 담그면서 배추를 절이고 난 물을 버리고 또 만들고 했는데 설씨 새댁이 시집을 오고는, 촌장격인 할아버님께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기름먹은 문종이를 깔고 소금물을 만들면 한 집이 배추를 절이고 그 물에 소금을 아주 조금만 더 넣어서 또 다른 집 배추를 절이면 된다. 하여 아주 요즘 말로 선지식인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 같다.
풍속도 세월 따라 변화한다고 앞서 글에서 언급 했듯이 지금 생각하면 별로겠지만, 당시는 배추김치 김장이 끝나고 나면 무를 한 장단(5일간) 담가두면 되었다니, 역시나 先 知識人이 되는 사람은, 꼭 권력을 가졌거나 높은 직위에 임한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덕을 베풀고자하는 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 수필가 동화 한 봉 수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48호입력 : 2017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