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59호입력 : 2018년 03월 06일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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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제3회) - 서상조
절기로는 낮이 길고도 긴 하지 밑인데도 명주에게는 밤이 길고도 길었다. 또렷해진 정신을 이완시키고 번잡한 상념을 몰아내고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휴일이면 늘 그렇듯이 점심때가 되어서야 첫 밥상이 차려졌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명주는 조심스레 퇴직 이야기를 꺼냈다. 난데없는 말에 아내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의외로 외동딸인 다빈이는 “아빠! 잘됐네, 좀 쉬세요 제가 4학년이니까 내년 봄부터 돈 벌어 올께요. 아니 조기 취업 나가면 늦가을부터도 가능 하겠어요” 50대 초반의 아빠가 쉬는 것을 반기듯 나섰다. “빠듯한 월급에 당신도 다빈이 키우랴 가사 일에 많이 힘들었을 테니 이번 방학에 저렴한 쪽으로 해외여행이나 다녀와요. 한 20여일 잡아서 마음 편하게 있다가 오는 거요. 여행경비 절약하게 휴대폰 로밍은 하지 말고, E-mail로 연락하면 되니까”
갑작스런 제안에 밥상을 중심으로 고요가 한 바퀴 돌다 가라앉았다. “더 늦기 전에 좀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돈이 필요하면 우리 하청업체에 나가서 품질관리만 해줘도 일당을 톡톡히 받을 수 있어” “우와! 아빠 짱이야. 인생은 그렇게 프리하게 사는 거예요. 돈을 좀 적게 벌어도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이지”
아내와 명주는 다빈이의 생각지 못한 반색과 자유로운 인생관에 자신들의 삶에서는 찾기 힘든 신선함을 느꼈다. 명주는 아내를 단단히 설득하고 나섰다. 하긴 설득이라기보다는 안심을 시키는 것이었다. 25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제동을 건 경우가 없는 아내는 늘 결과에 대한 걱정을 내 비쳤었다. 그럴 때 마다 명주가 조근 조근 설명을 하면 아내는 얼굴에 긴장이 가시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던 것이다. 그리고 명주는 내색 없이 자신의 거사 일자에 맞추어 여행날짜까지 잡아 주었다. 다빈이의 방학 가운데 이루어지는 20일 정도의 모녀해외여행이었다.
한 여름이 되어 열대야에 밤잠이 설쳐질 때 쯤, 명주는 사표를 내고 아내와 다빈이를 출국 시켰다.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질 만큼 마음껏 누렸다. 퇴직이란 평생 여러 번 할 수도 있겠지만 명주에게 퇴직이란, 제대로 된 직장으로서는 유일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평범하게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회사 직원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 될 만한 이벤트를 선물하고 나왔다. 직원 200여명 되는 회사의 생산 부장인 명주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김 전무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었다.
생산라인 회의라 3개 생산 부서의 현장 주임까지 4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들 긴장 한 채로 전무가 진행하는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회의 성격이 거의 군기 잡는 수준에서 진행과 마무리를 해왔었기에 그날도 김 전무는 명주를 가리키며 “진 부장! 너는 밑에 아이들 관리를 제대로 하기는 하는 거야? 불량률이 이래가지고 회사 말아먹을 참이야? 생산량은 또 어떻고? 지금 보다 15%는 up 돼야 당신 월급 찾아 갈 수 있어 알았어? 그거 못하면 사표 내던가 하라고 알아?”
그때 명주는 조용히 일어서서 천년을 두고 생각해도 속이 후련해지는 반격을 했다. “김 전무님, 마지막에 ‘알아?’ 하고 물었으니까 이제 내가 대답을 할 차례인데, 조금 길 테니까 경청해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지금 불량률은 0.1% 로서 절대적으로 존재 할 수밖에 없는 수치입니다. 우리 생산전문가들이 말하는 ‘신도 어쩌지 못하는 0.1%’ 인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량은 잔업하면 그렇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정상근무로는 불가능 합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업무적 대답은 다 했으니 사적인 대답을 할 차례군요. 그러면 지금부터 편의상에다가 나이도 엇비슷하니까 나도 반말을 하겠소. 김 전무, 당신이 이 회의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나도 알고 여기 40여명의 직원도 다 알아. 주마가편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이 최대한인줄 알면서 조금이라도 느슨해지지 않게 소위, 족치는 거잖아? 나는 당신을 알아. 내 눈엔 당신의 숨겨진 삶과 심지어 이면까지 보이거든. 그래서 사우나에 벌거벗고 앉아있는 보잘 것 없는 당신의 모습도 보이고, 룸싸롱 파트너에게 싼값에 어떻게 해보려고 치근 되는 것도 보이고, 동창생들끼리 모여서 꼬맹이 적 표정으로 낄낄대며 추억담을 나누는 것도 보이고, 그나마 그게 제일 봐 줄만 한 것이네.
콧물 질질 흘리던 꼬맹이 때 모습은 순수하긴 하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이야 약자 앞에서는 큰소리치지만 강자 앞에서는 당신꼬리가 항문에 틀어박히는 것도 보여. 아니! 당신은 산길을 가다가 토끼만 봐도 가랑이가 축축해 질 인간인 것도 알아. 사표 내라니까 지금 내가 당장 내겠는데 부탁하나만 하자. 어차피 이면을 가져야 한다면 남이 눈치 못 채게 감쪽같이 가지도록 해. 그렇게 완벽하게 속여야 다른 사람이 바보는 되더라도 아프지는 않을 것 아니겠냐, 마음이 . . .”
그 당시 김 전무의 당황한 표정과, 속 시원함을 드러낼 수 없는 직원들의 곤란한 표정이 또 한 번 떠올랐다. 최소한 명주에게는 그 일로 인해서 공짜 술 먹을 약속이 몇 달은 예약되게 되었다. 그러나 예약된 그 술을 먹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명주는 알고 있었고, 물길에 휩쓸리는 물풀 같은 그들의 영혼에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작가 약력 서상조 fire-wang@hanmail.net 2000년 『문예사조』시부문 등단 2001년 『대구문학』소설부문 등단 대구문인협회·솔뫼문학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고령지부 소설분과위원장 (사)한국문인협회 고령지부 회장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59호입력 : 2018년 03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