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접어들기 전에 멀찌감치 차를 세워두고, 변장한 모습을 점검한 다음 천천히 걸어서 집을 향해 갔다. 휴대폰으로 마지막 통화를 하면서 현재의 분위기를 파악 한 다음 수염과 안경, 그리고 가발로 철저히 변장을 했던 것이다.
집 앞에 도착하니 동생이 가까이 다가와 확인을 하고는 단단해 보이는 젊은 아이를 옆에 붙여 주었다. 어떻게 교육을 시켰는지 행동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장독대 옆에 자리 하나가 깔려 있고 작은 술상에 소주 한 병과 김치가 놓여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어 섰는데도 문상객은 열 명 남짓 했다.
10년 전 선친이 돌아 가셨을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때는 마당이 비좁아 골목에까지 전구를 연결해서 자리를 만들어야 했었다. 명주가 삼대독자라 가까운 친척이 없다시피 했지만, 인근 마을의 어른들께서는 명주를 봐서 들렀을 것이고, 또 명주의 인맥으로 도시에서 몰려온 사람이 여간 많지가 않았다. 생산부장이라 회사는 물론이고 하청업체까지 어떻게 알고는 찾아들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야말로 정승의 말이 죽은 것보다 못한 정승의 죽음인 셈이다. 먼저 와있는 문상객은 동네에서 비교적 나이를 덜 드신 중노인들이었다. 작은 마을에 젊은 사람 몇 명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영문도 모른 채 명주의 프로젝트에 참가중이니, 거동이 힘들어 들어앉은 노인마저 제외하면 더 올 사람도 없었다.
조의금을 사절한다는 소문은 났을 테고, 그저 명주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만 안고 서성거리다가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갈 폼 들이었다. “아이구, 독자 집안인데 10년 사이에 초상이 두 번씩이나 나다니 우환도 이런 우환이 없구만” “명주가 딸 하나뿐이잖아. 결국 대가 끊기네. 여기 집은 이제 누가 지키누?” “집 지킬 사람이 걱정이면 형님이 들어와 살으소. 이제 주인도 없는데” 명주는 진짜로 자신이 없어진 세계를 보는 것 같은 깊은 착각 속에서 얼른 다리를 만져 보았다. 그것도 모자라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착각의 혼란에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죽었다면, 저런 실없는 말들에 내 영혼이 실려 먼지처럼 부질없이 사라지겠지’ 명주는 종이컵에 안주도 없이 소주를 한잔 부어 마셨다. 술맛이 이상하리만치 달콤했다.
밤 10시 쯤 되어서야 한꺼번에 왁자지껄하면서 낯익은 얼굴들이 쏟아져 들어 왔다. 스무 명은 되어 보였는데 동창들끼리 특정장소에서 집결한 다음에 출발한 모양이었다. 영정사진도 없는 빈소에, 앞서 있던 둘만 마루에 올라서서 절을 하고 나머지는 마당에서 어정쩡하게 있다가 깔아 둔 자리로 삼삼오오 둘러앉았다. 앉은 채로 친구들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명주 쪽을 볼 때는 유난히 오래 쳐다보면서 자기네들끼리 수군수군 거렸다.
그때 한 친구가 “도훈이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데 우리가 알 길이 있나? 술이나 한잔하면서 도훈이 얘기 한 번 들어 보자구. 오늘 당번기사는 술 먹지 말고, 알았지?” 하면서 대화를 유도해 나가고 있었다. “사실, 떠나간 명주하고 친하다면 내가 제일 친하긴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명주 속을 들어가 본 것도 아니고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실감난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네. 최근에 만났을 때도 가정적으로나 주변 상황에 대해 아무 말도 없었네. 단지, 돌 편지가 뭐 어쩌고 하는 얘기는 했었는데 그건 술자리에서 별 뜻 없이 하는 말로 들렸어. 그것보다 모처럼 명주 덕분에 이렇게 모였으니 고맙게 생각하고 여기는 안주가 좀 그러니까 시내로 들어가서 술 한 잔 더 할 사람은 우리가 출발했던 장소로 오게나” “그래 맞다. 그런데 명주 집사람은 어딜 갔는데 이렇게 썰렁하지. 상주도 없는 초상집은 또 처음이네” “아무래도 둘이 사이가 안좋았길래 이렇지. 외국에 여행을 갔다지만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명주만 쏙 빼놓고 갈 리가 없지.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그리고 내 생각엔 틀림없이 이민을 간거야” “그나저나 명주 집사람이 나이차이가 좀 나지 아마. 40대 후반일 텐데. 좋은 나이에 거 참 아깝네. 아까워” “아이구! 저놈 말 하는 거 봐라. 명주가 살아서 들었으면 잡아먹힐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야, 이 친구들아 농담도 할 게 따로 있지. 오늘 같은 날 그런 말들을 하면 되나?” 같은 자리에 앉은 친구들끼리 이야기 하다가 건너편 친구와 큰소리로 지껄이기도 하고 각자 생각대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상주도 없는 초상집이라 예를 갖출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명주는 눈을 감은 채 소주를 한잔 들이켰다. 술맛이 사카린을 녹인 물처럼 더욱 달작지근 했다. 오늘의 술 한 잔은 명주의 인생에서 덤으로 느껴졌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