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농부가 일어나 제일 먼저 달려가는 논들에서 거랑의 물이 졸졸 흘러 논과 논으로 흘러가는 정경을 바라보는 일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행복함이다. 가물지 않고 흘러가는 저 물의 위력은 생명의 물이자 영원으로 가는 물이다.
물 한 방울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농부에게 지금 사랑의 대상은 저 흘러가는 물인 것이다. 말없이 제 몸을 부수고 뒹굴고 섞여가며 하얀 거품을 내기도 하고 풀잎에 걸려 자빠지기도 하면서 거랑물이 졸졸 끝없이 잘도 흘러가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호수가 산 그림자를 안아 주듯이 말없이 이해하고 포용하고 안아주는 것이다. 그저 보듬어 주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안아 주는 일. 우리가 그대를, 그리고 당신을 아무 이유 없이 안아 주는 일이다. 예쁜 꽃을 보고 와락 끌어안아 보듯이, 호박꽃이 벌을 안아주듯이 머물게 해 주듯이 그렇게 상대를 살폿이 안아 줘 본 일이 있는가?
아무 생각도 없는 뻐꾸기 노래를 듣고 나도 답으로 한 곡조 뽑았다는 친구의 말 하나가 나를 와락 기쁘게 했다. 혼자 밭을 매면서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밭에서 뻐꾸기 노래를 감상할 수 있는 시인의 마음 한 자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일이 뭐 별거인가.
내가 그대를 사랑함은 저녁별을 같이 바라보듯이 그렇게 소소한 일이리라. 바람 불고 폭풍우 치면 그대를 걱정하는 일이리라.
논들에 서면 와랑와랑 물 흘러가는 소리, 숲의 뻐꾸기 소리, 호수와 산이 그려내는 포용력, 모든 것이 꿈결 같고, 모든 것이 생명으로 통하는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다리가 긴 백로 한 마리가 논둑을 따라 서성거리면 나도 초록 들판이 되고 영원으로 흐르는 찰나도 된다.
소설가 김훈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을 그는 사랑이라 했다.”
자연과 사람은 서로 사랑의 장단을 어떻게 맞추고 있는지를 논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고 느낄 뿐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화답하는 저 자연의 조화로움, 그렇게 우리도 사랑할 일이다. 그렇게 우리도 깊어갈 일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저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