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지역 토기·도자기 생산의 어제와 오늘 양질의 도토·울창한 산림·편리한 운송로… 고령, 여말선초 도자수공업 생산의 중심지 명성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입력 : 2014년 05월 26일
↑↑ 쌍림면 합가1리 토기요지 전경
ⓒ 고령군민신문
요지(窯址)는 토기를 구워 내던 토기요지(土器窯址)나 도자기를 구워 내던 도요지(陶窯址) 등 가마 유적으로, 우리말로는 가마터라고 할 수 있다.
토기 및 도자기를 원활하게 생산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다음의 조건들이 잘 갖추어 져야 한다.
먼저, 토기나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양질의 점토와 도토(陶土)가 생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가마에서 구울 때 필요한 땔감이 되는 산림이 울창하고 풍부해야 한다.
또한 도공에 의해 만들어진 제품을 옮기기 편리한 운송로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전제 조건 위에 우수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인적 자원인 도공들의 예술 정신이 어우러져서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고령지역은 이러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고령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및 도자기를 생산하던 요지는 크게 고령, 운수, 성산, 쌍림,우곡 등 5개 지역에 무려 120여 개소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령지역은 고려말 조선초도자수공업의 중심지로 경기도 광주에 버금가는 도자기 생산지라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사실은 고령의 성산사 부동 도요지(사적 제71호)와 성산기산동도요지(사적 제72호)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고령 대평리분청사기요지(경북 문화재자료 제279호)가 경북의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성산면 사부동 도요지 발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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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도자기, 상품(上品)으로 평가 받다. 고령, 쌍림면 합가리 토 기요지 토기편 고령지역은 조선시대에 우수한도자기 생산지로 널리 잘 알려졌다.
이는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나 김종직(金宗直, 1431∼1491)의 ‘점필재문집’ 등에서 고령의 도자기를 높이 평가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용재총화’ 권10에는 “자기(磁器)는 외방 각 도에 만드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고령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정교하다.
그러나 그것도 광주(廣州)에서 만든 것만큼 정묘하진 못하다.”고 하였다.
‘점필재문집’이준록’하,’ 선공사업 제4’에 따르면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金叔滋, 1389∼1456)가 고령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고령에서 매년 진상하는 백사기(白沙器)를 만드는 공인들을 잘 지도하여 사기의 정치하고 깨끗함이 광주(廣州)나 남원보다 우월해졌다고 한다.
또 김종서(金宗瑞)가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고령에 와서 김숙자와 함께 식사를 할 때 책상 위에 있는 백사기(白砂器)를 보고 “고령의 사기가 매우 좋다”는 말을 여러 번 계속하였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누차 이에 대해 말했다고도 전한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령현의 예현리에서 생산하는 자기는 상품(上品)이라고 하여 국내 도자기 중에는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예현리는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성산면 사부동과 기산동도요지 일대로 이곳에서는 ‘고령 인수부(高靈 仁壽府)’나 ‘고령 장흥고(高靈長興庫)’, ‘사선서(司膳署)’ 등의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가 출토됐으며, 사부동과 지산동도요지는 상품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중앙 관청인 장흥고나 인수부 등에 직접 납품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