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도성 방어체계 고령지역 성곽 대부분 대가야때 축성…18개소 확인 몇개의 城 방어선 이뤄 규칙적 배치 전력적 축조 지금은 거의 무너지고 완전한 형태 갖춘 곳은 드물어 주산성, 왕궁의 배후성으로 가장 중시한 최후 방어선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입력 : 2014년 06월 09일
↑↑ 고령 도진리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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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은 크게 도성(都城)·읍성(邑城)·산성(山城) 등이며, 산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성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지리적 요충지에 축조하는 전략적인 요새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행정 통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이라는 글자가 성곽(口)을 창(戈)으로 지키는 형상을 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성곽은 국가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우리나라 산성의 기원은 위만조선(衛滿朝鮮)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삼국지’에는 부여(夫餘)나 삼한(三韓)에 성곽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수많은 축성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성을 거점으로 한 산성 방어체계를 구축하여 외부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문헌으로 살펴본 대가야의 산성 고령지역에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삼한시대에 반로국(半路國)이 있었으므로 삼한시대부터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고령지역에서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성곽은 다산면의 ‘월성리 토성’으로 대략 4세기 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령지역에 본격적으로 성곽을 쌓기 시작한 것은 대가야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의 대가야 멸망 기록에는 대가야 궁성의 출입문인 ‘전단문’ 혹은 ‘전단량’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일본서기’에서는 514년에 대가야가 남해안의 하동·광양, 낙동강 유역의 의령·밀양 등지의 국경 지대에 산성과 봉수대 등을 쌓아 백제, 왜, 신라 등에 대비한 것으로 전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이산성(耳山城)과 가혜성(加兮城)이 기록되어 있다.
‘이산성’은 문무왕 13년(673) 9월에 축조했다고 한다.
‘이산성’은 현재 고령읍의 주산성으로,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이후 문무왕 때 새롭게 수축했음을 알 수 있다.
가혜성은 선덕여왕 13년(644)에 백제와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둘러싸고 싸울 때 등장한다.
이 성은 낙동강변에 있었던 성으로, 우곡면 도진리의 도진리 산성으로 보인다.
대가야는 왕도에 도성을 비롯해 경남과 전라도 지역의 국경지역에 이르기까지 산성과 봉수를 축조하여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도읍을 지켜라, 고령지역 산성의 현황 고령지역에서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성곽은 모두 18개소에 이르는데, 대부분 대가야시대부터 축성되었다.
그 중 대가야의 궁성이었던 평지성인 ‘대가야 궁성’인 도성과 ‘월성리 토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성이다.
산성의 분포는 고령읍에는 연조리의 주산성, 장기리의 망산성, 본관리 산성과 옥산성, 내곡리 산성 등 5개소로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