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56호입력 : 2018년 02월 06일
[소설] 퍼포먼스 (제1회) -서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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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린 명주는 술에 취한 채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을 즐기듯이 걸으며 대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습관처럼 돌아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음력으로 오월 하고도, 여드레는 넘어 섰다 싶을만한 상현달이 도시의 서쪽 스카이라인에 걸려 있었다.
달을 올려다 본 뒤 명주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달은 야릇하게도 사람을 그리움에 젖게 만드는 마법을 지녔는지 방금 전에 헤어지고, 택시에서 또 한 차례 장황한 인사를 나눈 친구를 또 찾게 만든다. 집나간 며느리를 탓하기보다 ‘저놈의 달이 원수야’ 라고 탄식했던 시아버지도 있었다고 했으니, 달은 무슨 비밀을 지닌 것이 사실일 것이다.
명주가 휴대폰 덮개를 열자 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택시에서 통화를 하고 난후 피차간에 술이 취해 휴대폰의 보호 덮개만 닫았던 모양이다. 명주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도훈이와, 또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 종진이가 아직 남은 술을 마저 정리하느라 높은 언성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실 명주는 밤이 새도록 그 자리를 지켜도 아쉬울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새벽에 일어나 시골집 수리를 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집주인이 없으면 일꾼들은 놀면서 시간만 보내야하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한 명주가 휴대폰을 어떻게 해야 도훈이와 연결이 될까싶어 만지고 있는 사이에 유난히 높은 언성의 친구 목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종진이가 “너희 둘은 어쩌면 그리도 친하냐?”는 식으로 하는 이야기는 휴대폰을 만지면서 예사롭게 듣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뒤에 도훈이 가 하는 말이 “야! 임마, 친구는 다 똑 같지 특별한 놈이 어디 있어? 명주 그 자식이 워낙 나를 좋아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 주는 거지” 설마, 반전의 농담을 즐기려고 그렇겠거니 하고는 이제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사실 나는 명주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고리타분하잖아! 말 한마디만 어긋나도 따지고 드는 꼴은 지겹단 말이야”
명주는 대문간에 털썩 주저앉아 전화기를 땅바닥에다 던져 버렸다. 전화기 속에서는 지껄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계속 흘러 나왔다. 명주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왔다. 그리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지러움 증이 느껴졌다.
TV드라마 속에서 뒷목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위기감을 느낀 명주는 몸을 추스른 뒤 가까스로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문득 명주는 뼛속 깊이 새겨왔던 잠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왔다.
‘한마디를 하는 데는 많은 고심이 따르고 이미 내뱉은 말은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라’ 10대 후반 때부터 그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이날까지 살아온 명주는 도훈의 배신적인 말보다, 그리고 자신을 기나긴 착각 속으로 몰고 가버린 그 좌우명보다도 그동안 쌓아온 관계의 진실성이 하염없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아 깊은 좌절감에 빠져 버렸다.
누구를 만나서도 소중한 친구하나 있다고 늘 자랑하고,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친구를 위한 어떤 희생이라도 보람되게 생각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아 왔었다. 50년 넘게 단단하게 다져진 정체성에 엄청난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흡사 그것은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벽에서 아래쪽의 디딤돌을 군데군데 뽑아 버린 것 같은 그런 심정인 것 이었다
날이 샐 때까지 소파에 누워서 친구 도훈이와의 지난날을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창밖은 어느새 부옇게 여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주는 몽롱한 정신으로 일어나 시골을 향해 출발했다. 누워있어 봤자 어차피 잠이 들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른 아침이지만 토요일인 관계로 교외로 빠지는 차량이 꽤 많았다. 창문을 내리고 새벽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어정쩡하게 누워 있는 것 보다는 훨씬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길도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안고 도훈이와 다녔던가? 도시에 살면서도 고향에 갈일이 생기면 서로 연락을 해서 항상 같이 가곤 했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카네이션을 사서 어버이날 하루 전날 밤에 달려 나갔던 일이며, 동네잔치나 문상을 갈 일이 있어도 늘 같이 다니던 길이었다.
운전하는 가운데서도, 주마등처럼 떠오른 일들이 무수히 스쳐지나간 다음에야 명주는 한 친구의 배신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잘못 된 좌표를 둔 것이 아닌지 생각의 방향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래, 세상은 원래의 제 색깔은 숨겨두고 상대를 관리하기 위해 겉으로만 적당히 동색인 척 하는 것인지도 몰라’ 명주는 노견에 차를 세우고 어지럼증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거대한 이면의 세계가 낯설게 다가왔다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친구 도훈의 일은 그 둘의 대화가 진실이라 가정했을 때에 어쩌면 그것이 세상에서 일상적인 일이고, 그 반대의 안팎이 상이하지 않은 관계는 억 만 분의 일에 불과 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 전체가 배신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도훈으로 하여금 때늦게 삶의 큰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것 같기도 하여 쓴 웃음이 지어졌다.
어쨌든 엄청난 숙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마음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시골집에 도착한 명주는 언뜻 놀랐다. 일군 세 사람이 벌써 집 마당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지루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명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구, 무슨 꼭두새벽부터 나오셨어요” 놀라고 미안한 마음에 인사를 건네는 명주에게 옆 동네 강선배가 인사차 말을 받았다. “이 사람아, 시원할 때 일을 해놔야 낮에는 좀 쉴게 아닌가?” 하고는 객지에서 들어와 산다는 일꾼들을 소개했다.
낡은 사랑채만 뜯어내고 마당을 넓히려 했던 명주는 어쩌면 계획보다 빨리 귀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본채 수리까지 몽땅 맡겨 버렸다. 그리고는 어수선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탓에 들판을 한 바퀴 돌아 볼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어릴 때 소를 먹이던 뒷산은 변함없이 배부르게 앉아 있었다. 나무가 그때 보다는 더 무성해져 산이 전체적으로 큼직해진 느낌이 있었다. 정체성을 되찾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러나 명주는 자신을 키워 낸 고향의, 변함없이 온화한 환경들이 인간관계에서 영민하지 못한 자신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변하지 못하는 내가 어쩌면 잘못 된 게지’ 명주는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이어 갔다.
들판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자신을 혼란에 빠지게 한 원점에 대해 온 몸으로 부딪혀 깨어 부순 뒤 존재할지도 모르는 이면의 세계를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명주는 집수리까지 단단히 일러두고는 다시 도시를 향해 차를 몰았다. 집 근처까지 도착한 명주는 늦은 점심 겸 속 풀이를 할 생각으로 자주 가는 복어 탕 집으로 갔다. 맞이하는 주인아주머니의 인사가 오늘따라 더욱 호들갑스럽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전에 올 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명주 자신이 달라진 것이었다. 이제 사람한테는 일단 거리를 두고 싶기도 하고, 어쩌면 그놈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설령 상대가 진심일지라도 명주는 정상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거대한 이면의 세계를 느껴 버렸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 이면에 대한 오류가 있다할지라도 묵살해 버릴 오기가 생겨 버렸다. 늦은 점심이긴 하지만 사실은 아침인 셈 이었다. 명주는 밑반찬으로 나온 복어 껍질을 씹으며 복어가 원래 지녔을 독을 들이키듯 비장한 표정으로 소주를 목구멍에 부어 넣었다. (다음호에 계속) - 서상조 시인·소설가
[작가 약력] 서상조 fire-wang@hanmail.net 2000년 『문예사조』시부문 등단 2001년 『대구문학』소설부문 등단 대구문인협회·솔뫼문학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고령지부 소설분과위원장 (사)한국문인협회 고령지부 회장
고령군민신문 기자 / kmtoday@naver.com256호입력 : 2018년 02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