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채 못다 벗은, 멀리서 간절한 노래를 품은 맑은 교회 차임벨이 들려 올 듯한 아침 닮은 새벽의 끝자락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본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하여도 육학년 후반의 노인네가 이 시간에 뜀박질을 하기는 당최 서먹서먹한 기분이다. 일전에 동창생 여식애가 자기는 군청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에서 매일 아침마다 건강관리를 하고 있는데 몸매가 예뻐졌다고, 미스 코리아 선발전의 선수처럼 생쇼(live show)를 하여 웃고 떠들면서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는 했었지만 운동이라고는 ‘새마을 운동’ 정도만 아는 위인인지라 무덤덤하다.
월례행사처럼 한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을 하고 노인성 질환에 따른 약을 구황식량(救荒食糧) 정도로 고이고이 모셔오고 있는 실정이지만, 식사량 조절로 체중관리를 할망정 당체 운동은 마음이 가질 않는다. 아직 49제도 덜 지난 친구 녀석의 하늘 여행이 마음 한 켠을 담금질하기도 하여 요가를 해 보기로 했다. 동영상을 수 십번 반복 보면서 따라해 보니 진작에 몸 관리를 할 걸?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네 인생역정이 후회한다고 되돌아 갈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넋두리로 맴돌 뿐이다. 문득 그림생각이 났다. 유화 그림은 그리다가 덧씌우기 하면서 자신의 예술혼이 표현될 때까지 수정이 용이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필자는 화가가 아니니 깊은 학문적으로 논함이 아니라 가볍게 생각해 보았다는 말이다.
성경에 “아는 만큼 보인다.”란 구절이 있다. 정말 가슴이 아프도록 옳은 말씀인 듯하다. “봄에 새싹이 파랗게 돋아 나오고, 가을에 빨갛게 단풍이 든다.”해도 별반 꾸중들을 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식물원에 가보면, 가을에 새싹이 나오기도 하고 색상도 어린 이파리부터가 빨간 녀석들도 있으니, 어찌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한정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해답이라고 하여 둠이 마음 편할 것 같다.
지금은 국외 여행의 자율화로 넘치도록 동식물의 다양성을 보았을 것이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필연코 논쟁이 일어나고 갈등이 조장되는 것 같다. 요즘 지난 홍수로 순직한 장병에 관련된 사건 전개가 제법 시끄럽게 되고 있다. 마냥 너털웃음으로 지내면서 소위 [한삿갓]으로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즐겁게 살다가 가기로 작정한 사람이 정치에 아무른 관심도 없을 듯하지만, 일견 순직한 병사에 대한 보은이나 앞으로의 철저한 준비로 같은 사고가 없도록 하겠다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는 뒷전이고 보편성을 떠난 정쟁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일전에 조그마한 시골에서 운영하는 글 잔치에, [지금은 ‘저애보다 네가 잘되어야 해.’가 아닌 ‘네가 저 애에게 도움을 주면 저 애도 네가 부족한 무엇을 도와 줄 거야.’로 가르침을 준다면, 우리 기성세대가 저승 가고 나서 살아갈 저이들에게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란 글을 피력하여 소중한 칭찬을 받아 보았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젊은 시절에는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림에 깊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흥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음악관련 연주회를 감상하거나 그림전시회, 조각 작품 공원을 찾아서 깊은 공감대를 한껏 마시고 오면 노인성 질환 조차 가벼워 진 것 같아서 그야말로 휠링(healing)의 포만감을 맛 보곤 한다. 그중에 수묵화(水墨畫)를 감상하면서 느끼는 점은, 유화처럼 덧칠 수정이 불가하고 오히려 칠을 하지 않는 기법으로 서양화의 원근법과 심지어 음영법까지 표현해 놓은 부분 앞에서는 오히려 존경심까지 느끼곤 하고 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수묵화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이나 부처는 그렇게 허점 없이 살다 가시면서 오히려 우리 사람세상을 이롭게 지도하시고 가신 것이라 본다. 인간이 신처럼 살수야 없겠지만, 사회복지정책에 의하여 절대적인 생명연장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노년층들이여 이제라도 실수하면 수정이 불가 한 水墨畫(수묵화)처럼 살아 보지 않으렵니까?
|